서울에는 조선시대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4개의 큰문과 4개의 작은문 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요 오늘은 서울 4대문 이름 및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고 현재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확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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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4대문
조선울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서 궁궐과 종묘를 지었는데요 이어 한양을 지키기 위해 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축조했습니다.
4대문은 각각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으로 특히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성 건축물 입니다.
흥인지문
흥인지문, 일명 동대문은 대한민국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곽의 대문입니다. 2008년 숭례문의 화재 이후, 이곳은 조선 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도성 사대문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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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의 창건과 역사적 변천
흥인지문은 1398년에 완성된 서울의 주요 성문 중 하나로, 원래는 흥인문이라 불렸습니다. 이름의 의미는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의 덕목인 '인'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1868년 크게 손상된 후 복구 과정에서 이름에 '지(之)' 자를 추가하여 현재의 흥인지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34년 일본에 의해 동대문으로 명명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복원되었습니다.
- 흥인지문의 건축적 특성
흥인지문은 앞면이 5칸, 옆면이 2칸인 2층 구조의 성문입니다. 다른 성문과 비교하여 화려함은 덜하지만, 웅장한 느낌을 주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반달 모양의 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옹성은 방어적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위층을 지탱하는 합리적인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특히 세밀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의 장식은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 풍수 지리와의 관계
서울의 풍수에서 흥인지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낙산(左청룡)과 인왕산(右백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문 이름에 '지' 자를 추가하여 4글자가 되었으며, 이는 다른 성문과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또한, 반달형의 옹성은 이러한 풍수적 요소를 반영하여 설계된 것으로, 서울의 방어적 요소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숭례문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된 조선 시대의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이 문은 1396년에 창건되었으며, 1448년 세종대왕 시절에 크게 개축되었습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정궁으로 삼은 이후, 숭례문이 남쪽 방향의 정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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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 지리의 영향과 숭례문의 명칭 의미
숭례문의 편액은 다른 문들과 달리 세로로 쓰여진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서울 남쪽의 조산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불꽃처럼 일렁이는 산 형태를 가진 관악산의 화기를 상징적으로 꺾기 위함입니다. 또한,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오행에서 남쪽을 의미하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숭례문의 건축적 특성과 역사적 가치
숭례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우진각지붕을 갖춘 겹처마 구조입니다. 건물의 토대는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무지개문과 거대한 석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2층 구조는 아래층부터 위층까지 내려오는 견고한 기둥으로 지지됩니다. 상량문에 의하면, 이 건축물은 조선 초기 건축 생산 체계와 장인 조직의 중요한 자료로도 평가받습니다. 현재는 조선 초기 다포계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명칭 복원과 문화유산으로서의 중요성
1934년 일제 강점기에 '남대문'으로 명명되었던 숭례문은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을 통해 원래의 명칭인 '숭례문'으로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이러한 명칭 복원은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정체성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돈의문
돈의문, 일명 서대문은 원래 서울 사직동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은 1396년 태조가 서울 도성을 처음 세울 때에 건설되었으나, 풍수지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1413년에 폐쇄되었습니다.
- 문명의 변화와 재건
폐쇄 이후, 1422년 세종 대왕의 명령으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다시 성문이 건설되었고, 옛 이름인 돈의문으로 다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지역은 '신문로'라고도 불리게 되면서 서울의 중요한 통로로 자리 잡았습니다.
- 일제강점기와 문의 철거
1915년,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라 돈의문은 철거되었습니다. 당시의 사진을 통해 돈의문이 홍예문과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를 갖추고 있었으며, 주변은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문의 역사적 의의와 사신의 길
돈의문은 중국 사신이 의주대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주요 경로였습니다. 이로 인해 돈의문은 한양 도성의 국제적인 관문 역할을 했으며, 조선시대 국제 외교와 교역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숙정문
숙정문은 본래 북대문으로도 불렸으며,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동쪽 고개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문은 1395년에 숙청문으로 처음 세워졌지만, 풍수지리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1413년에 폐쇄되었습니다.
- 풍수지리와 문의 폐쇄
풍수학자 최양선의 조언에 따라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는 백악산 동쪽과 서쪽 고개에 문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숙정문과 창의문은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 숙정문의 특이한 사용과 속설
숙정문은 통행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아 영구적으로 폐쇄되었으나, 한재가 심할 때에는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는 음양오행에서 북쪽을 음으로 여기고, 한재 때 음을 부양하고 양을 억제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숙청문을 열어 두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진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이는 문의 위치가 음방에 있기 때문에 나온 말로 추정됩니다.
- 문의 이동과 복원
1504년에는 숙정문이 약간 동쪽으로 이동되어 석문만 세워졌으며, 문루는 건축되지 않았습니다. 1976년에는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따라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 숙정문으로의 명칭 변화
어느 때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숙정문으로의 명칭 변경은 1523년 중종실록 기록 이후로 확인됩니다. 1531년과 1587년에는 숙정문으로 표기되어,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으로 명명된 것으로 추측됩니다.